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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가와 요시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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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마가와 요시타다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이마가와 노리타다의 아들이다. 146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루가 슈고직을 계승했으며,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편휘를 받아 요시타다로 이름을 바꿨다. 응인의 난 당시 동군에 속해 엔슈 지방에서 시바 씨와 대립하며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나, 1476년 엔슈 시오가이자카에서 잔당에게 습격당해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이마가와 가문의 내분과 후계 다툼을 야기했으며, 이세 모리토키가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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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가와 요시타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직책이마가와 씨 당주
아버지이마가와 노리타다
어머니우에스기 우지사다의 딸
계급다이묘
출생일1436년 2월 26일
사망일1476년 3월 1일
자녀이마가와 우지치카
배우자기타가와 부인
재임 시작1461년
재임 종료1476년
이전이마가와 노리타다
이후이마가와 우지치카
충성[[File:Japanese_crest_Imagawa_Akadori.svg|15px]] 이마가와 씨
지휘스루가 국
통칭히코고로
법명조호지덴 게이잔 쇼코 다이젠조몬(長保寺殿桂山昌公大禅定門)
묘소시즈오카 현시즈오카 시아오이 구 오이와 정 린사이 사
시즈오카 현 기쿠가와 시 쇼린 사
관위종5위하, 가즈사노스케, 지부다이후
막부무로마치 막부・스루가 국슈고
주군아시카가 요시마사 → 요시히사
씨족이마가와 씨
부모아버지: 이마가와 노리타다
형제자매요시타다, 노리카쓰, 노리요시
정실: 기타가와 도노 (이세 모리사다의 딸)
자녀오기마치산조 사네토미의 실, 우지치카, 신판
전투
전투/작전도토미 전투
기타 정보
일본어 표기今川 義忠

2. 가계

이마가와 요시타다는 이마가와 노리타다와 우에스기 우지사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기타가와 부인과 혼인하였다.[1]

2. 1.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이마가와 노리타다
어머니우에스기 우지사다의 딸
아내기타가와 부인
자녀


3. 생애

1461년 아버지 이마가와 노리타다가 위독해지자 스루가 슈고직을 이어받았다. 1467년 응인의 난이 발발하자, 쇼군 경호를 위해 교토로 상경하여 동군에 가담했다. 이는 서군이었던 엔슈 슈고 시바 요시카도(斯波義廉)와의 오랜 대립 관계 때문이었다. 상경 중 호조 소운(北条早雲)의 누이 기타가와 덴(北川殿)과 결혼한 것으로 추정되며, 1473년 적자 류오마루(龍王丸, 후의 우지치카)가 태어났다.

1468년 호소카와 카츠모토(細川勝元)의 요청으로 도카이도(東海道)의 시바 요시카도의 분국 엔슈 국을 교란하기 위해 스루가로 귀국, 엔슈 진출을 도모하여 시바 씨 및 지방 국인들과 전투를 벌였다. 1473년 미노 국(美濃国) 슈고대격 사이토 묘춘(斎藤妙椿)에게 공격받은 동군 미카와 국(三河国) 슈고 호소카와 나리유키(細川成之)를 지원하기 위해 미카와에 출진했다. 그러나 병량 영지를 둘러싸고 동군 오와리 국(尾張国) 슈고 시바 요시요시와 대립했고, 미카와 기라 요시마사(吉良義真)의 피관이었던 엔슈 국인 쿄카이 씨, 카리노 씨와도 대립하여 이오 나가쓰라(飯尾長連)의 지원을 받아 멸망시켰다. 이로 인해 시바 요시요시, 호소카와 나리유키와도 적대하게 되었다.

1475년 요시카도의 중신 카이 토시미쓰(甲斐敏光)를 서군에서 배신시킨 동군은 카이를 엔슈 슈고대로 임명했으나, 엔슈에서 시바 씨 세력을 몰아내려는 요시타다와 카이 씨의 관계는 악화되어 엔슈 정세는 혼란스러워졌다. 카이와 시바 요시요시는 엔슈로 내려와 군사적 압력을 강화했고, 요시타다 또한 엔슈로 출진하여 시바 요시요시 측 국인과 싸웠다.

1476년 미쓰케 성(見付城)을 수리하고 저항하던 엔슈 국인 요코지 시로베에와 카쓰마다 슈리료(勝間田修理亮)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 카쓰마다 성(勝間田城)과 요코지 성(横地城)을 포위하여 토벌했다. 그러나 귀환길 밤 엔슈 시오가이자카(현재 시즈오카 현(静岡県) 키쿠가와 시(菊川市))에서 요코지 씨와 카쓰마다 씨 잔당의 잇키를 당해 빗나간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요시타다의 급사로 4세 료오마루가 남겨졌지만, 요시타다의 행위로 인해 료오마루는 반역자 가족으로서 죽을 가능성이 생겼다. 이 때문에 이마가와 가문에서는 요시타다 사촌 동생 오가 슈만이 가독 계승을 주장하여 료오마루파와 슈만파로 나뉘어 내분 상태가 되었다.

3. 1. 가독 상속과 초기 활동

가키 3년(1441년) 가키의 난 당시 아버지 이마가와 노리타다(범충)를 대신하여 1,000기의 군사를 이끌고 오와리 국까지 출진하였다.[1] 코쇼 2년(1454년) 쿄토쿠의 난에서는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시게우지 토벌 명령을 받은 아버지의 대리로 출진하여 가마쿠라를 공략, 그 공로로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이 무렵 원복하여 장군 요시마사의 편휘( "義"자)를 받아 '''요시타다'''(義忠) ( "忠"은 아버지 노리타다의 한 글자)라고 이름을 바꿨다.

칸쇼 2년(1461년) 아버지의 위독으로 순가 슈고직을 계승하였다. 가독을 계승한 요시타다는 장군 요시마사로부터 그의 서형(庶兄)인 호리고에 구보 아시카가 마사토모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았다. 칸쇼 6년(1466년)에는 가이 국의 다케다 노부마사와 함께 가마쿠라에서 코가로 이동한 시게우지 토벌 명령을 받았다.

3. 2. 엔슈 이마가와 가문의 어려움

이마가와 가문은 이전에 이마가와 료슌의 공으로 본거지인 스루가 국 외에도 도토미 국의 슈고 직을 일족이 보유하고 있었지만, 오에이 26년(1419년) 이후 도토미 슈고 직은 시바 씨가 맡게 되었다.

게다가 도토미 이마가와 씨의 이마가와 노리마사(료슌의 증손)는 조로쿠 3년(1459년)에 스스로 중심이 되어 일으킨 "주엔 잇키"가 슈고다이에 의해 진압되었고, 사후에는 호리고에(현 후쿠로이 시 호리고에) 등의 영지마저 슈고다이인 가리노 미야우치쇼후에게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간쇼 6년(1465년) 7월 26일에는 그 영지의 대관 인가까지 막부로부터 슈고다이에게 정당화되어 버렸다. 그 덕분에 료슌 이래의 미쓰케 성(현 이와타 시 미쓰케)에서 쫓겨난 이마가와 사다노부(노리마사의 아들, 료슌의 현손)를 스루가에서 보호했다는 경위에서 이마가와 씨와 시바 씨의 대립이 심화되었다.[1]

3. 3. 응인의 난과 엔슈 출정

응인의 난이 발발하자, 이마가와 요시타다는 1467년 쇼군 경호를 위해 상락(上洛)하여 동군(東軍)에 가담했다. 이는 서군(西軍)이었던 엔슈(遠江) 수호(守護) 시바 요시카도(斯波義廉)와의 오랜 대립 관계 때문이었다.

상락 중에 요시타다는 호조 소운(北条早雲)의 누이인 기타가와 덴(北川殿)과 결혼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가와 덴과의 사이에서는 1473년 적자(嫡子) 류오마루(龍王丸, 후의 우지치카)가 태어났다.

1468년, 호소카와 카츠모토(細川勝元)의 요청으로 요시타다는 도카이도(東海道)에 있는 시바 요시카도의 분국(分国) 엔슈 국을 교란하기 위해 준슈(駿河)로 귀국, 적극적으로 엔슈 진출을 도모하여 시바 씨 및 지방 국인(国人)들과 전투를 벌였다.

1473년에는 미노국(美濃国) 수호대격(守護代格) 사이토 묘춘(斎藤妙椿)에게 공격받은 동군의 미카와국(三河国) 수호 호소카와 나리유키(細川成之)를 지원하기 위해 미카와에도 출진했다. 그러나 병량(兵糧) 영지를 둘러싸고 같은 동군인 오와리국(尾張国) 수호 시바 요시요시와 대립했고, 미카와의 기라 요시마사(吉良義真)의 피관(被官)이었던 엔슈 국인 쿄카이 씨(巨海氏), 카리노 씨(狩野氏)와도 대립하여, 요시타다는 이오 나가쓰라(飯尾長連)의 지원을 받아 이들을 멸망시켰다. 이로 인해 시바 요시요시, 호소카와 나리유키와도 적대하게 되었다.

1475년, 요시카도의 중신 카이 토시미쓰(甲斐敏光)를 서군에서 배신시킨 동군은 카이를 엔슈 수호대로 임명했다. 그러나 엔슈에서 시바 씨 세력을 몰아내려는 요시타다와 카이 씨의 관계는 악화되어 엔슈의 정세는 혼란스러워졌다. 카이와 시바 요시요시는 엔슈로 하향하여 군사적 압력을 강화했고, 요시타다 또한 엔슈로 출진하여 시바 요시요시 측 국인과 싸웠다.

1476년, 요시타다는 미쓰케성(見付城)을 수리하고 저항하던 엔슈 국인 요코지 시로베에와 카쓰마다 슈리료(勝間田修理亮)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 카쓰마다성(勝間田城)과 요코지성(横地城)을 포위하여 이들을 토벌했다. 그러나 귀환길 밤에 엔슈 시오가이자카(현재 시즈오카현(静岡県) 키쿠가와시(菊川市))에서 요코지 씨와 카쓰마다 씨 잔당의 일기(一揆)를 당해 빗나간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3. 4. 엔슈에서의 죽음

『이마가와키(今川記)』 등에서는 요코지(横地)와 캇슈마다(勝間田) 두 사람을 마치 막부에 반역한 것처럼 적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내통한 시바 요시아키(斯波義顕)는 막부로부터 임명된 슈고(守護)이기 때문에, 요코지와 캇슈마다의 행동은 막부와 슈고의 지시에 따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공격받아 죽임을 당한 이마가와 요시타다(今川義忠) 쪽이 막부에 반항한 형태이다.

요시타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겨우 4세의 료오마루(龍王丸, 후의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가 남겨졌지만, 요시타다의 행위로 인해 료오마루는 어린아이라 해도 생모인 기타가와도노(北川殿)와 함께 반역자의 가족으로서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생겼다. 이 때문에 이마가와 씨(今川氏)에서는 요시타다의 사촌 동생인 오가 슈만이 가독 계승을 주장하여 료오마루파와 슈만파로 나뉘어 내분 상태가 되었다. 교토쿠의 난에서는 막부(동군)와 협력 관계에 있던 센고쿠 우에스기 가의 우에스기 사다마사가 슈만의 친척(사다마사와 슈만의 아버지가 사촌)으로서 가재 오타 도칸을, 호리고에 구보 아시카가 마사토모가 집사 우에스기 마사노리를 각각 스루가(駿河)에 파견하여 개입하는 사태가 되었다. 이때 슈만과 도칸은 료오마루를 죽이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막부는 이마가와 씨의 적류인 료오마루를 토벌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요시타다 사망의 경위 때문에 막부가 료오마루를 보호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마가와 씨의 내분을 조정(실제로는 료오마루의 보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스루가·도토미(遠江) 문제에 관여해 온 이세 모리사다(伊勢盛定)의 아들이자 기타가와도노의 형제였던 막부 신지슈(申次衆)의 이세 모리토키(伊勢盛時)가 스루가로 내려갔다.[1] 이것이 모리토키와 이마가와 씨의 유대를 강하게 하여, 후의 모리토키의 관동 진출과 호조 씨(北条氏) 탄생의 계기가 된다.

참고로, 당시 도토미 국에는 고이치카슈(御一家衆)로서 이마가와 씨의 종가 쪽에 해당하는 미카와 기라 씨(三河吉良氏)의 영지(하마마쓰 쇼(浜松荘) 등)가 있었다. 기라 씨는 같은 일족인 이마가와 씨와 시바 씨의 싸움에 대해 중립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 가신 중 거카이 씨(巨海氏)와 가리노 씨(狩野氏)는 요시타다에게 저항하여 멸망했고, 이이오 씨(飯尾氏)는 요시타다에 호응하여 당주인 이이오 나가쓰라(飯尾長連)가 요시타다와 함께 전사했기 때문에(『소초 일기(宗長日記)』), 도토미의 기라 씨 가신단은 시바파와 이마가와파로 분열되었다. 이는 그 후 도토미를 둘러싼 이마가와 씨와 시바 씨의 싸움이 계속되는 원인이 되었다.

4. 요시타다 사후

요시타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겨우 4세였던 아들 료오마루(후의 우지치카)가 남겨졌다. 그러나 요시타다의 행동으로 인해 료오마루는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생모인 키타가와덴과 함께 반역자의 가족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 때문에 今川氏에서는 요시타다의 사촌 동생인 오가 슈만이 가독 계승을 주장하여 료오마루파와 슈만파로 나뉘어 내분이 일어났다. 겐토쿠의 난 당시 막부(동군)와 협력 관계에 있던 센고쿠 우에스기가의 우에스기 사다마사는 슈만의 친척(사다마사와 슈만의 아버지가 사촌)이라는 이유로 가재 오타 도칸을 파견하였고, 호리고에 구보 아시카가 마사토모는 집사 우에스기 마사노리를 각각 스루가에 파견하여 이 내분에 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슈만과 도칸은 료오마루를 죽이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막부는 今川氏의 적류인 료오마루를 토벌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요시타다 사망의 경위 때문에 료오마루를 보호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今川氏의 내분을 조정하고 료오마루를 보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스루가·토토미 문제에 관여해 온 이세 모리사다의 아들이자 키타가와덴의 형제였던 막부 신지슈의 이세 모리토키가 스루가로 내려갔다. 이는 모리토키와 今川氏의 유대를 강화시켰고, 훗날 모리토키의 관동 진출과 후호조씨 탄생의 계기가 된다.

당시 토토미국에는 고이치카슈로서 今川氏의 종가에 해당하는 미카와 기라씨의 영지(하마마쓰 쇼 등)가 있었다. 기라씨는 같은 일족인 今川氏와 시바씨의 싸움에 대해 중립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기라씨의 가신 중 거카이씨와 카리노씨는 요시타다에게 저항하다 멸망했고, 이이오씨는 요시타다에게 호응하여 당주인 이이오 나가쓰라가 요시타다와 함께 전사했다(『소초 일기』). 이 때문에 토토미의 기라씨 가신단은 시바파와 이마가와파로 분열되었고, 이후 토토미를 둘러싼 今川氏와 시바씨의 싸움이 계속되는 원인이 되었다.

5. 요시타다가 편휘를 내린 인물


  • 다테 다다무네 (후지시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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